👩‍⚖️

이방인

Created
2023/10/15 09:22
Author
Albert Camus
추천
군인 시절 읽고 나에게 꽤 큰 영향을 주었던 책인데,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이방인>에 대해서는 새삼 내가 더 얹을 말이 무엇이 있을까.
그저 읽으며 들었던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적어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뫼르소는 살인자이다. 따지고 보면 별다른 이유 없이 네 발의 총격을 통해 타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묻지마 살인범인데. 그런데 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뫼르소의 편을 들게 되고, 뫼르소가 억울한 처지에 당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카뮈는 재판 과정에서 철저히 피해자(뫼르소에게 살해당한 아랍인과 그의 유족들)에 대한 언급은 배제한다. 사실상 뫼르소는 살인으로 인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죄”로 인한 재판을 받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렇게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억울한 사형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밌는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사형 선고를 받을 만한, 즉 죽어 마땅한 일은 무엇인가?” 아랍인을 살해한 것은 사형까지는 부당하지만, 어머니에게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일은 죽어 마땅할까? 아니면 반대인가?
답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살인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완전히 소외되고, 정작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하는 일련의 논리가, 재판 혹은 사회 정의를 다소간 희화화하도록 의도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어차피 우린 다 죽을 목숨인데. 뭐가 그렇게 심각해?”
소설 내내 “태양”과 “빛”이 강조된다.
장례식장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태양, 알제에서의 해수욕을 평화롭고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햇빛, 현기증이 날 정도로 뜨겁게 해변을 달구는 태양과 연이은 뫼르소의 살인 사건, 면회 현장을 가득 채우는 햇빛, 감옥 생활에서 좁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태양빛 등… 온 순간에 뫼르소의 관심사는 “태양”에 집중된다.
이 태양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어떤 순간에 태양은 장면을 섬뜩하게 만들기도, 평화롭고 태연하게 만들기도, 또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뫼르소의 “생명”에 대한 암시였을까? 아니면 숙명적인 “죽음”에 대한 암시였을까?
<이방인>의 유명한 첫 문장.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독자는 <이방인>을 읽으며 뫼르소의 무심함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죽음을 접하고는 통상적인 슬픔보다는 “연차를 내야 하는 것에 대한 번거로움”을 느끼고, 다음 날 여자를 만나 해수욕을 즐기고 정욕을 나누며, 장례식에서는 무덤덤한 태도를 보인다.
또 애인 마리에 대해서도,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마리의 질문에 “그런 것은 아무 의미 없다”고 하면서도, 결혼하고 싶다는 마리의 말에는 “그러자고” 한다.
이어서 이러한 독자의 당황스러움에 답변하듯 뫼르소에게 “사형”이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물론 그 순간 독자는 어느새 재판부가 아니라 뫼르소의 편이 되어 있다는 게 참 재밌는 구석이다!)
그런데, 실상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이 슬프지 않지 않았다.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품 내 시선은 내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위에 머무른다. 모든 일상에서 뫼르소는 일면 어머니를 떠올리고, 뫼르소가 느끼는 번거로움들 속에서는 모종의 죄책감이 껴있다.
마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뫼르소는 마리를 사랑하지 않지 않았다. 뜬금없이 마리를 보고싶어하고, 마리가 곁에 있지 않을 때 그녀를 떠올리며 정욕을 느끼며, 감옥 속에서 그녀를 그리워한다.
그럼 대체 뫼르소는 어떤 인물일까?
작품 내 묘사를 참고해보자면, 그는 단지 “말수가 적은”,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작품 내에서 그의 감정의 묘사는 의도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어있다. 배제된 대상은 “사회적 유희”,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위해 본인이 직접 느낀 것을 말하거나, 그 이상의 것을 꾸며내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뫼르소의 사회적 유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고 목이 잘리고 만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죽음에 독자는 회의감을 가지도록 의도되어있다.
사회적 유희에 진절머리가 난 알베르 카뮈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닐까?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인생을 왜 낭비하고 있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사형 직전,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며,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느낀다.
결국 <이방인>은 “죽음이라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뫼르소는 어떻게 돌연 이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에 “의미 없다”는 답을 하던 그가, 무엇을 찾아낸 걸까?
E.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