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문장들로 시작되는 이 에세이는 삶, 혹은 죽지 않음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부조리의 추론
문제는 부조리이다. 인간은 저마다 뜻밖에 태어났지만,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는다.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 모든 업적은 의미를 잃는다. 곧 사라질 존재에게 던져지는 “왜?”라는 단 하나의 물음이면 충분하다. 모든 것은 논리적인 정당성을 잃는다.
이제 카뮈는 부조리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부조리의 논리적인 귀결은 무엇인가? 부조리는 우리에게 자살을 명령하는가?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가?”
부조리는 “왜?”라는 물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단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의미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통, 노력, 열정, 슬픔, 희망 같은 것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다. 즉 세계는 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은 세계에게 합리를 요구한다. 이 세계를 어떤 법칙으로 환원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세계의 비합리성에 대하여 합리성을 요구하는 이성의 이길 수 없는 대결. 이것이 부조리이다.
부조리한 인간
여기서 부조리는 철저하게 인간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세계의 비합리적임 그 자체는 어떠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의 발단은 이성의 합리에 대한 요구이다. 그러므로 이 에세이는 가장 인간다운 삶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세계의 비합리성과 우리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요구, 그 어떤 것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는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의 이성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세계를 종교적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혹은 우리의 이성을 부정함으로써 부조리의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 즉 희망 - 은 유효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자살 역시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자살은 그 자체로 동의를 암시한다. 자살이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고, 세계의 비합리성을 인정하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러나 “왜?”라는 물음 없이 부조리는 성립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에세이를 통해) 내리고 싶은 결론은 “과연 부조리를 인식한 채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다. 부조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부조리한 창조
만약 세계가 확실, 명료한 것이었다면 예술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개인의 삶 전체의 근본적인 무용함을 완성하는 것 말이다. (중략)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부조리의 조건 - 비합리적인 세계와, 이 비합리적인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우리의 이성 - 뿐이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의 문제를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시키는데, 바로 ‘반항’이다.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은, (그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서야)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를 간직한 채,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비합리적인 세계와 부조리함을 인지한 채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감’이 바로 부조리에 대한 유일한 반항이다.
여기서 카뮈는 “부조리의 인간”의 삶의 양식을 제안한다. 반항의 삶을 선택했을 때,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는 자유와 열정이 주어진다. 우리의 모든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반대로 모든 것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행위가 우리에 의지임을 의미한다. 즉 “모든 것이 허용된다.”
모든 것이 허용되는 삶에서, 우리는 깊이가 아닌 양으로 살아간다. 무엇을 하든지 결국 똑같다면, 최대한 많이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반항이리라. 부조리의 인간의 유일한 미덕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통해 삶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한 채, 그저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경험하고 묘사하는 것. 그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삶이다. 이것은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시지프 신화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시지프스 신화의 시지프스는 신으로부터 영원히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올리고 나면, 다시 산 밑으로 바위가 굴러떨어진다. 시지프스의 형벌은 우리 삶의 부조리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카뮈는 이러한 시지프스를 철저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관찰한다. 밀어올린 돌이 산 정상에서 굴러떨어지는 그 순간, 시지프스는 산을 다시금 걸어내려간다. 그 모든 행동들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시지프스는 그 때 부조리의 고통과 함께 이에 대한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을 느낀다. 이 때 시지프스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게 된다.
부조리에 대한 집착과 열정으로,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 속에서 행복(?)과 자유의 삶의 양식을 도출해내는 에세이. 책을 덮자마자 “부조리”라는 단 하나의 주제를 연주하는 교향곡 같다는 생각을 했다.
E.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