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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과학이 여는 세계

Created
2020/12/26 05:57
Author
이광근
추천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별 생각 없이 집어든 책인데, 별안간 너무나도 재밌게 읽은 인생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앨런 튜링이 기계적인 계산으로 증명해내지 못하는 수학적 명제가 무수히(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중 부산물로 탄생한 튜링 머신(Turing Machine). 읽고 쓸 수 있는 칸이 나누어진 테이프(메모리)와 기계의 현재 상태에 따라 작동하는 규칙을 기록한 규칙표(소프트웨어), 그리고 이러한 규칙표를 실행하는 장치로 이루어진 단촐한 기계가 컴퓨터 시대의 문을 연다.
한편 동시대의 클로드 섀넌은 인간의 논리 연산(Bool 연산)과 회로의 작동 방식이 일대일 대응한다는 것을 밝혀낸다. 회로가 닫힘은 참에, 그렇지 않음은 거짓에, 그리고 병렬은 or 연산에, 직렬은 and 연산에 대응된다. 이를 통해 인간은 회로를 이해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메모리(놀랍게도 회로를 통해 기억함을 구현해낼 수 있다)와 중앙 처리 장치를 구현해낸다. 두 가지 혁명이 맞물려 컴퓨터를 완성시킨다.
컴퓨터는 똑똑한 일을 해내는 바보같은 기계이다. 이러한 기계를 이용하기 위해 인간은 언어와 알고리즘을 발전시킨다. 가역적인 언어들의 다리를 만들어 컴퓨터와 인간을 연결한다. 알고리즘을 통해 인간이 (현실적으로) 해낼 수 없던 문제를 풀어나간다.
무질서도(entropy)와 대응되는 정보량(p(x)log2p(x)-\sum{p(x) \log_2{p(x)}})이 통신을 좌우한다는 사실이 클로드 섀넌에 의해 밝혀진다. 무질서도가 높을수록, 예측 불가능할수록 정보량이 많다. 인간은 인코딩 기술을 통해 정보량을 줄이는 데 성공했고, 데이터 통신의 무결성을 확보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컴퓨터를 통해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 인간은 컴퓨터를 완벽한 하인으로 만들어내는 것까지도 성공한다. 인간도, 컴퓨터도 현실적으로 풀지 못하는, 수많은 수학자들을 오랜 시간 짓밟아 온 NPNP 문제들. 이러한 문제를 역이용해 컴퓨터도, 사람도 알아낼 수 없는 비밀을 만들어낸다. 열쇠가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연속적인 혁명들의 영향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점점 확장해나간다. 인간 고유의 지능에 집중하여 지능을 확장해나가고, 놀이를 개발해 본능을 확장해나가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현실을 확장해나간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홀린 듯 읽어가며 느낀 내 감정은 설렘과 호기심이었다. 1936년 앨런 튜링이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논문을 제출한 후 고작 80년 남짓. 혁명은 아직 한창이다.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보편 만능의 튜링 머신부터 시작해서 정보 이론, 그리고 암호화까지. 그것들을 발상한 끈기 혹은 영감, 그것들을 발전시켜 온 의지와 탐험, 그리고 새로이 발견될 것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책을 읽는 내내 이런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벅차게 했다.
"한 사람의 뇌 안에는 2014년 현재 전세계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가 가진 스위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스위치가 모여 있다."
"우선 애매했던 대상을 과감하게 정의한다. 그리고 그 정의가 받아들인 만하다고 설득한다. 그런 후 그 정의로부터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사실들을 유도한다. 세상을 바꾼 두 논문이 같은 패턴이다."
E.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