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와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인생 여행이 되었다.
21.07.02
제주도 출발
PDS의 2Q 회고를 끝마치고, 16시 30분이 조금 넘어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의 이륙 시간은 19시 55분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추가된 절차로 공항이 붐비니 비행기를 타고 싶다면 세 시간은 일찍 오라는 투의 경고 문자로 인해 일찍이 출발했다. 한 손으로 맥캘란 15년산을 껴안고, 왜인지 육중한 가방을 떠매고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어제 오늘의 격렬한(?) 회의로 인함인지 살짝 어지럼증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설렜다. "그냥 또 한 번의 여행일 뿐인데, 왜 이렇게 기대되고 설레는 걸까?"하는 생각에 의아했다. 아마도(분명히?) 나에게 2분기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아주 일찍이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탑승 수속은 일사천리였다. 5분도 안 되어 모든 수속이 끝나고 탑승장으로 들어온 나는 약간 허탈하기도 했다. 18시쯤 되니 배가 고파 우동을 사 먹고, 활주로가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아 오늘의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공유했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왜 여행지에서 여유롭게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그렇다.
그렇게 있다가 비행기에 올라탔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제주도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호테우 해수욕장 & 맥주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여, 택시를 잡아타고 이호테우 해수욕장 코앞에 위치한 한 서핑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했다. 게스트하우스였지만 나는 독방을 예약하여, 화장실 한 칸에 퀸 사이즈 정도의 침대, 그리고 화장대가 있는 아늑한 방이었다. 창문을 열어 고개를 돌리면 저 너머로 파도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와글와글한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짐을 풀고 잠깐 누워있다가, 신발을 갈아신고 밖으로 나왔다.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칫솔 세트와 코젤 다크 캔을 사들고 바로 해변가로 향했다. 여름이 시작되려는 듯 마는 듯,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찍이 끼리 끼리 자리를 잡았다. 저들끼리 도란 도란 앉아 떠들기도 하고, 연인끼리 나란 나란히 앉아 속삭이기도 하고, 친구끼리 폭죽을 터뜨리기도 하고 있었다. 나는 인파의 끝 무렵에 자리를 잡아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물을 항상 좋아한다. 물놀이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소리를 듣는 것, 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해도 좋다. 그렇게 이따금씩 맥주로 나의 기분을 축이며 바다를 맛봤다. 눈을 감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듣기도 하고, 시선을 따라 파도가 일렁이고 물결이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저 시선을 고정하고 딴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한다. 나는 왜 물이 좋을까, 하는 물음이 떠오른다. 슬프면서도 태연한 분위기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은 걸까, 정복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인가, 아니면 멜랑콜리한 분위기의 물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고 싶은 허세일까. 그러다가 정작 딴 생각에 잠겨 바다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금 물 속으로 잠겨든다.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내 주변에 이런 저런 무리들이 자리를 잡아 앉는다. 왠지 말수가 적은 한 커플, 그리고 어딘지 제주가 익숙한 듯한 한 사람을 포함한 세 명의 여자들. 코젤 다크를 마무리한 나는 기네스 캔을 하나 더 사들고, 에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또 맥주를 마신다. 성시경의 킬링보이스를 듣는다. 성시경 형님의 콘서트는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내일 오전에는 서핑 수업이 예약되어 있기에,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모래를 털고 숙소로 돌아온다.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요가를 20~30분 정도 하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먹을 것을 고민하고, 이런 저런 기대들을 뭉게뭉게 떠올리다보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
21.07.03
나라국밥 - 고사리 육개장 & 감자전
오전 8시 즈음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라국밥으로 향했다. 이 근처에서 사람들이 아침 해장을 하는 데 애용하는 식당인 듯했다. 설렘에 잠을 설친 탓에 피로로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오히려 여행의 풍미를 더해주는 느낌이었다.
밤새 비가 내렸던 것 같다. 길바닥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고, 풀들은 갓 샤워를 마친 것마냥 젖어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난 후의 특유의 내음이 시원했다. 숙소에서 5분 정도를 걸어 나라국밥에 도착했다.
고사리 육개장과 감자전을 하나씩 시켰다. 최근에 다이어트에 익숙해져 아침을 거의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음식이 솔직히 썩 맛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서핑 학원으로 향했다.
바구스 서핑 스쿨
서핑 스쿨로 향하는 길에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서핑 스쿨에 도착해 수트로 옷을 갈아입었다. 해변가 바로 앞 컨테이너에 위치한,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30대 중반 내외 정도 되어보이는, 머리가 벗겨지고 뚱뚱한 남자 두 명과, 나와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여자 두 명과, 서른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 네 명이 있었다.
서핑 수업은 [이론 수업, 육지 수업, 바다 수업, 자유 시간]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론 수업에서는 간단히 서핑 매너와 서핑 보드에 대해 배웠고, 육지 수업에서는 패들링과 테이크오프를 연습했고, 바다 수업에서는 실제 서핑을 연습했다. 강사가 머리가 벗겨진 남자를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덕분에 남자의 친구가 좋은 놀림거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나는 서핑을 그 해변가에 있던, 서핑을 처음 배우는 그 누구보다 잘 했고, 덕분에 아주 재밌었다. 서핑 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가, 파도가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 패들링을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파도가 나를 후욱 하고 밀어주는 순간이 온다. 그 때 자세를 잡고 보드에서 일어나면 서핑이 시작된다. 파도를 타고 미끄러지는 보드를 딛고 있는 발바닥을 통해 파도의 출렁거림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내 몸 정면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시야가 탁 트인다. 넓은 바다 위에 서서 파도를 타고 미끄러지며 바람을 맞고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주변에서 튕겨오는 물방울이 내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고돔 - 고등어회 & 전복내장비빔밥
세 시간 동안의 서핑이 끝나고,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13시 30분 즈음이 되었다. 정말 아주 배가 고프다. 서핑 스쿨 옆에 있는 정자에 앉아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눈앞에 있는 고돔 이라는 식당에 가 보기로 결심한다. 리뷰가 하나도 없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식당이었지만 배도 고프고, 여행이란 항상 예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재밌기에 그냥 가 보기로 했다.
잭팟이었다. 알고 보니 7월 1일자에 오픈한, 아주 어린 식당이더라.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는 식당 주인 부부와 요리를 하시는 듯한 어머니는 풋내가 났다. 나는 5만 원짜리 고등어회 단품 하나와 한라산 한 병을 주문했다. 그랬을 뿐인데... 무슨 한 상 가득한 반찬에, 성게알미역국에, 전복내장비빔밥에, 전복회와 멍게 등등이 나와버렸다. 나는 흥분하여 에어팟을 꽂고, 잔에 소주를 한가득 따르고, 본격적으로 먹을 준비를 한다.
행복하기 그지없는 한 시간이었다. 배부른 것도 잊고 한 상을 다 비우고 말았다. 잡은 지 한 시간이 되었다는 고등어회는 쫀득한 식감에 특유의 향이 살아있었고, 전복회는 원래 전복회를 특히 좋아하지는 않는 내가 아주 맛있게 먹을 정도로 신선한 바다 내음이 났다. 전복내장비빔밥은 밥에 내장을 비빈건지 내장에 밥을 비빈건지 모를 정도로 진했고, 성게알미역국 역시 성게알 향이 가득했다. 중간 중간에 양념장에 부추와 양파를 무친 무침을 곁들여 지짐이를 먹으면 또 모든 것이 새롭다. 당장 죽어도 좋을 정도로, 오히려 그게 최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정말이지 최고였다.
유탑유블레스 호텔
점심을 한가득 먹고, 택시를 타고 함덕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님이 아주 말이 많고, 놀랍게도 재밌었다. 제주도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 관광지에 대한 이야기들, 지역 소개 같은 이야기들을 계속 해 주시는데 솔직히 재밌기도 하고, 말씀을 잘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오죽하면 내릴 때 "이런 저런 이야기들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었어요!"하고 내렸다.
그 길로 유탑유블레스 호텔에 바로 체크인했다. 널찍한 화장실에 널찍한 침대 두 개, 그리고 통유리로 된 창 밖으로는 수평선까지 펼쳐진 바다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비싼 만큼 그 값을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대만족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다가, 수영복을 입고 또 바다로 나갔다.
피곤하고, 혼자여서 조금 뻘쭘한 감도 있어 막 수영을 해대지는 못했다.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기도 하고, 떠 있기도 하고, 이리 저리 어슬렁거리며 한 시간 정도 바다를 만끽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이제 원주도 퇴근하여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 여행이 다시금 시작된 느낌이었다. 설렜다.
함덕식탁 - 게우밥 오므라이스 & 해물라면
숙소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함덕식탁 이라는 음식점에 찾아갔다. 전복내장비빔밥이라고 하는 게우밥 오므라이스와 해물라면을 시켜 먹었다. 점심을 하도 많이 먹어댄 탓에 아직도 배가 부른 것 같았지만, 무엇 하나 양보할 수 없었다.
오므라이스와 해물라면 둘 다 푸짐했다. 오므라이스에는 버터에 구운 전복 세 마리와 왕새우 세 마리가 곁들여져 있었고, 해물라면에는 게와 새우 등이 가득 차 있었다. 계란은 부드러웠고, 게우밥은 고소했다. 또 해변가 근처에서 먹으면 왠지 맛이 한 단계 상승하는 라면 역시 당연하게도 맛있었다. 두 그릇을 다 비워버리고 배가 불러 고통스러운 채로 음식점에서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바람 소리가 꽤 짙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산책로를 따라 바다를 구경했다. 어느 외진 바위틈에 내려가 보았는데, 어떤 한 여자가 쪼그려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더라. 무슨 사연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나도 흔히 하는 짓거리이기 때문에 그다지 유별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조금 유별나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럴 수 있지 뭐.
짙은 바람으로 인해 파도는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성난 파도는 장엄했다. 평화롭고 여유롭던 낮의 해변가와는 다른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콰르르- 콰르르- 거리는 파도 소리는 태초를 떠올리게 한다. 지구의 태초부터 그렇게 있었을 파도이다. 그런 파도를 나는 빨려들듯 쳐다본다. 죽음이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회항
숙소로 돌아가 원주에게 연락을 해 본다.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연락이 없는 것이 조금 의아하다. 혹시 비행기 사고가 난 건 아닌지, 걱정되어 네이버의 실검 차트를 둘러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원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할 수 없어 김포로 회항했다는 것이다.
완벽한 하루였건만, 내 멘탈이 흔들린다.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기다렸던 마음에 아쉽기도 하고, 원주의 멘탈이 걱정되기도 했다. 원주가 제주도 여행을 포기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혹 그렇다고 해도 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그렇게 헛헛한 마음에 누워서 바다를 보며, 폰을 보며 뒹굴거리다가 새벽 두 시가 훌쩍 넘어서야 잠을 청한다. 내일은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 잘 착륙할 수 있을까, 걱정하느라 선잠을 잔다.
21.07.04
초록색 글씨는 나의 친구 원주가 적은 글이다.
원주 도착
불안하고 초조했던 탓인지,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에 잠에서 깬다. 어제의 회항이 무색하게 창 너머에는 화창한 바다가 태연하게 펼쳐져있다. 나는 바로 전화기를 들어 원주에게 잘 오고 있는지, 전화를 해본다. 전화를 받은 원주는 이미 제주도에 도착해 있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 중이라고 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 후 원주가 숙소 문을 두드린다. 어제는 밤새 렌트한 차에서 잠을 청했지만, 못내 잠들지 못하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고 한다. 아직 많이 이른 시간이었기에, 원주가 여행을 위한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기로 했다.
잠들어서 잠깐 잠깐 의식이 돌아올 때 마다 시간은 널뛰었고, 너무 추웠다.. 찬규는 안 추웠을까?.. 여튼 나보다 살 있는 것들은 추위를 잘 모른다. 낮잠을 청하기엔 아까운 제주도의 시간과 추위로 인해 나의 낮잠은 얕으면서도 실속있었다.
아침 산책
나는 이미 잠에서 깨버렸기에, 원주가 푹 잘 수 있도록 숙소의 불을 다 꺼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호텔에서 간단한 조식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그 길로 함덕 해안가를 따라 산책을 시작했다. 날은 밝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려 햇빛을 흩뿌리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바다가 해안가로 계속해서 물을 차근차근히 밀어내고 있었다. 해안가를 따라 걷는 내내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감싸며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조금 걷다보니 돌무더기 사이로 모래 바닥이 드러난 곳이 있었다. 모래 틈에는 다슬기니, 작은 게니 하는 것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고, 원통형으로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용도 모를 구조물 사이에는 우물처럼 바닷물이 고여있었다.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각자 볼 일을 보고 있던 갯바퀴들이 산책 나온 이방인을 피해 우수수 달아났다. 처음에는 꼭 바퀴벌레같은 것들이 아주 징그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계속 보다 보니 바퀴벌레보다는 새우같기도 하고, 은근히 귀엽기도 했다. 그래도 닿기는 싫어 조심조심 피해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한두 시간이 지나버렸고, 이내 조금씩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을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슬슬 점심 시간이 되어가기도 하여 숙소로 돌아갔다.
그의 후기를 들을때면 낮잠을 잔 게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고민에 빠지게된다. 6월 제주도의 바람은 따뜻하고 야릇했다.
엄마공간 - 해물탕
숙소로 돌아가 씻고, 원주를 깨워 다시금 여행을 시작할 채비를 했다. 원주를 기다리느라 맛보지 못한 맥캘란 위스키를 빈 속에 한 모금 흘려넣은 후, 힙 플라스크에 가득 채워넣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왠지 성에 차지 않았는지 폭우가 되어 거센 소리를 내며 온 세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는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엄마공간 이라는 해물탕집에 들어갔다. 해물탕은 (비싸지만) 아주 푸짐했고, 우리는 매우 배고팠기에 당연하게도 아주 맛있었다. 이따금씩 힙 플라스크를 꺼내 맥캘란을 마시고 나면, 다른 그 무엇도 별로 상관없는 듯 만족스러웠다.
찬규는 몰랐겠지만 생물 문어가 아닌 해동 문어라서 조금은 아쉬웠다. (본좌는 문어에 진심인 편) 물론 그것빼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모아놨기에 그저 행복했다. 힙 플라스크에 담긴 양주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맛있었다.
해수욕 1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힙 플라스크에 다시금 위스키를 채워 넣고 해수욕을 하러 나갔다.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물은 항상 좋고, 물 속에 들어가 노는 것은 더할 나위가 없다. 수영을 하고, 물 위에 둥실둥실 떠 다니고, 위스키를 마시고, 모래사장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거나 뭐 이런 저런 짓거리들을 잔뜩 하고 나니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내가 빌려 준 바지를 입고 바다에서 오줌을 싸면서 미친놈처럼 웃던 원주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또 배가 고파져있었다. 저녁에는 한치낚시를 체험하러 배를 타러 갈 참이었다.
비가 오고 있었고, 해는 깊게 가려져 은근히 추웠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추위가 싫다. 그래서 더 미친 새끼처럼 바다에 뛰어들며 내 온몸의 근육이 발열하게끔 발작했다. 그럼에도 살짝 떨렸던 것은 물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다. 처음 간 넓은 해수욕장은 안전요원이 못 놀게 해 옆에 있는 아담한 해수욕장으로 옮겼다. 그 곳에서 놀던 기억은 꽤나 귀엽고 재미지다. 특히 찬규 바지에 지리던 기억이 지렸달까. (지리지리산 지리지리네~지리지리산을 정복했네. 갑자기 떠오르는 지리산 송 그때나 이때나 난 항상 지린다. 난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살면 안되게끔 설계된 것 같다.)
한치낚시 실패 & 제주 흑돼지
한치낚시 체험 배를 타러 이호테우 해변으로 출발했다. 배가 너무 고팠기에, 이른 저녁으로 흑돼지를 먹고 갈 참이었다. 노곤한 몸을 택시에 싣고 30~40분 정도를 날라 이호테우 해변에 도착했고, 굽써라는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한치낚시 체험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었다. (위스키와) 돼지고기는 역시나 정말로 맛있었다.
배고파서 그랬을까 정말 뒤지게 맛있었다. 고기 훈내 사이로 분 단위로 넘기던 맥캘란은 화룡점정이었다. 밖이 보고싶어 일부러 문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았는데 비가 세차게 내렸고, 먼 수평선은 일렁였다. 원근감을 무시하는 파도는 불길한 내 마음과 같았다. 역시나 선장님은 출항을 포기하였고, 아무래도 원피스를 덜 보신게 아닐까 농을 던지며 속으론 '씹탱 X됐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저녁의 일정을 파괴시킨 이 비가 이번 여행의 본질을 담게 된 복선은 이 시점이 아녔을까. 무계획 속에서 고기를 먹으며 내다본 비는 정말 시원했고 당장이라도 빠져들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에, 폭우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고, 아니나다를까 폭우에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바람에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무척 기대했던 만큼이나 실망했지만,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분위기를 너무 다운시키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우리는 근처에 괜찮아 보이는 술집을 찾아가보았지만, 그마저도 닫아 있었고, 호텔 루프탑에서 운영하는 자쿠지를 이용해볼까도 하다가, 왠지 짜치는 바람에 포기하고 숙소에서 멍하니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사실 꽤 우울했다. 하늘은 나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폭우를 뿌려대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잠깐 텐션이 떨어진 시기가 있다면 이 때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찬규나 나나 육체적 정신적 체력은 튼실한 편이라 서로를 배려하며 이 여행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좋았던 여행도 어떤 고비라든가 타지에 대한 부족한 정보 때문에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는 때가 있는데, 이번 여행에 이 시점 빼면 그런 포인트가 없던 것 같다. 2021년 제주도 여행은 정말.. 완벽 중 완벽의 여행이 아녔을까.
광란의 밤
그렇게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가 우리는 이윽고 맥캘란 병을 집어들고, 직접 잡아보지는 못한 한치회를 포장하여, 바닷가에서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먹기로 하였다. 곧바로 숙소에 우산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가 근처 식당에서 한치회를 포장하고, 폭우 속의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이번 여행을 나의 인생 여행으로 만들어준 순간이자, 광란의 밤이 시작되었다.
궂은 비로 인해 아무도 없는 해변에는 온 세상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원시의 꿈을 꾸게 만드는 밤의 파도소리와, 그러한 해안가를 마치 우리만의 영역으로 만들어주는 듯한 음악 소리만이 들려왔다. 땅이든, 바다든, 나의 머릿카락이든, 옷가지든 모든 것을 사정없이 두들기는 빗줄기는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나에게는 부드럽고 축축한 모래바닥과, 계속해서 육지에 도전하는 듯한 바다와, 전신을 생생하게 일깨우는 빗줄기와, 한치회, 그리고 위스키밖에 없었다. 이 해탈의 경지,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이었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생생함, 자유로움, 우월감, 고립감, 이런 것들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렇게 한치회와 함께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우고는 그 순간을 축복이라도 하듯 폭죽을 터뜨렸다. 원주가 폭죽 하나만 사 와달라기에 편의점에서 큰 묶음을 사버렸고, 원주는 이 큰 묶음에 한꺼번에 불을 붙여 버리더니 바다를 그냥 축제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의 밤은 그렇게 피날레를 맞이했다.
그 후에도 뭐 해안가를 따라 뛰어다니고 걸어다니고, 노래도 불러대고, 달밤에 운동도 하고, 비가 잦아들자 밖으로 나온 무리들에게 술도 얻어먹고 했지만, 이런 것들이 그리 중요치는 않은 것 같다.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
헤매다 숙소로 돌아와 잠깐 쉬었다. 몸은 살짝 지친 듯 무게감이 있어 침대에 눕고 싶은 기분이었다. 약간의 피로감은 정신을 산란시켜 수면욕을 자극하려했다. 안 된다. 정신을 차린 후 바로 맥캘란 병을 들고 밖으로 움직였다.
해수욕장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될 것 같은 횟집에서 한치를 사서 먹을 자리를 찾아봤다. 해변 옆엔 그늘 천막이 있는 BBQ 치킨집이 있었고, 그 곳은 안락하고 뽀송뽀송해 보였다. 하지만 찬규와 나는 그런 데서 추억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좀 더 특별한 곳에서 추억을 만들러 왔다.
앞에 미역과 잔돌이 겨털마냥 껴있는, 볼 거라곤 발끝에 닿는 파도, 수평선에 한치배가 뿜는 불빛들, 왼편엔 뽀송한 치킨과 인간들인 해변에 앉았다. (쓰고보니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나 볼게 많은 해변이었구나.) 처음엔 뭐라도 깔고 먹거나 음식을 올려 놓을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맞은 비가 몸을 타고흘러 내 배꼽에 닿는 시간만으로도(그거슨 10초면 충분) 그딴 건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각이다.
맥캘란을 힙 플라스크로 쪼개마시지 않고 본격적으로 들이킬 시간이 왔다. 호텔에서 가지고 나온 유리컵에 맥캘란을 따르며 온갖 부푼 행복이 내 가슴과 정신과 영혼에 가득 했다. 그 행복을 가로막는 건 혹시 비가 맥캘란을 묽게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 뿐이었다. (물론 그런 걱정 따윈 안해도 될만큼 맥캘란을 빠르게 들이켰다는 점...) 난 해변에 가서 폭죽을 안 터뜨린 적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다. 찬규에게 폭죽 좀 사오랬다. 그냥 기다란 막대기 서너개 사와서 툭툭 쏠 생각이었는데. 이 양반이 한 묶음을 사왔더라. 존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흘러나온 웃음과 함께 날 눈 돌아가게 만들었다.
폭죽을 한 방에 다 점화했다. 어렸을 적엔 모든게 부족했고, 겨우 갖고 있던 것들을 양분하며 그게 삶이든 불행이든 행복이든 어떠한 편익이든 얇고 길게 지속시켰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며 깨닫게 된 건, 그게 만약 행복이라면 그 다음 찾아올 불행을 걱정하며 엿가락 늘어지듯 행복을 찢을게 아니라 온 몸으로 그 행복의 원액을 찔러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행복은 곱절로 다가왔다. 그렇게 7월의 행복이 제주도 하늘에서 터졌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 파편들이 나에게만 박힌 것이 아닌 찬규의 삶 속에도 박혔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찡하게 아픈 기분이다.
그 날 숙소에서 우릴 성가시게 쳐다봤을 여행객들이여.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니 비온다고 그늘 안에 들어있지말고 좀 나오시게.
21.07.05
카페 델문도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펼쳐진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다. 여행이 끝나간다는 아쉬움과 함께, 완벽한 여행이 마무리되어간다는 뿌듯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우리는 적당히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해변가의 카페 델문도라는 곳에서 커피와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수많은 커플들, 그리고 무리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테라스 너머로는 화창한 바다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난 항상 여행가서 아침 먹는 게 제일 애매했다. 식욕 없는 인간의 삶이란 그렇다. 카페가서 꽤 맛있는 트로피컬 음료를 먹으면서 모카빵을 먹었다. 그리고 호텔부터 들고나온 마른 오징어도 정리했다. 이 곳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제주행 축지법을 쓴 진영이를 봤는데, 아 진짜 진영이 존나 귀엽고 웃기고 이상했다. 처음 보는 여자랑 온건지 뭐 사장님 비선지 무슨 여자한테 스폰받는 남자같은 여하튼 좀ㅋㅋㅋ 웃기고 이상한 스텐스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여자친구 사진을 찍어주고 그랬다. 그 모습을 찬규랑 몰래 보면서 그냥 혼자 막 웃었다. (아 말이 이상한데 그 분은 여자친구다.)
해수욕 2
주변에 무슨 오름(?)이 있다길래 그 곳을 가볼까, 어쩔까,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해수욕을 하기로 했다. 근처 샤워장에서 다시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비는 내리지 않았고, 하늘도 깨끗했다. 덕분에 사람도 많았다.
역시 수영도 하고, 떠 다니기도 하고 했다. 물놀이는 참 재밌지만 뭐 기록할 건 없는 듯하다. 모래사장에서 나는 깊은 구덩이를 판 후 스스로의 힘으로 나를 목만 빼고 생매장해버렸고, 원주는 공연음란죄를 적용할 수 있을 법한 조형물을 예술가의 혼으로 만들어냈다.
첫 날 해수욕은 정해진 일정이었고, 이튿날 해수욕은 계획의 변경으로 생겨난 이벤트였다. 첫 날 해수욕은 찬규와의 컨텐츠가 재밌었다면 이번 해수욕은 그냥 진짜 바다 자체를 즐겼다. 물이 쇄골에 살짝 닿는 곳부터 안전요원이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 직전에서 찬규와 파도를 타고 수영도 했다.
물이 목 근처까지 차오르니 살짝 춥기도 하여 쉴 겸 모래가 살짝 드러난 모래섬으로 갔다. 자연스레 모래를 가지고 놀았다. 찬규는 그냥 뭔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뭘 할까 하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만들었다. 궁금하면 다음에 나와 함께 바다에 가자. (아 그게 여자라면 굳이 모래사장까지 갈 필욘 없을 것 같다.)
회춘식당 - 옥돔구이 & 돔베고기
해수욕에 굶주린 우리는 회춘식당이라는 곳에 찾아가 옥돔구이와 비빔밥, 그리고 돔베고기를 먹었다. 아주 맛있게, 정신없이 먹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막 특출날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동감이다. 진짜 심각하게 굶주린 탓에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지만, 맛있게 먹었다!
서울로
그렇게 지치고 만족한 몸과 정신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여 나와 원주는 곱창집에서 소주와 곱창을 먹으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나 혼자 거의 백만 원 가량을 써버린 여행이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여행이었다. 이렇게 분기에 한 번씩 여행을 오자며 회포를 풀고는, 나는 집에 와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기점으로 분기별로 여행을 가보자는 약속아닌 약속을 했다. 가능할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주말에만 다녀오는 여행도 이렇게 긴 듯 짧게, 짧지만 굵게 강렬한 추억이 될 수 있다는게 신기한 여행이었다.
스스로 이상한 글을 끄적일 때 인생을 도자기에 비유하곤 한다. 매년 매주 매일 우리는 도자기라는 기억을 만들고 깨뜨리며 그 중에 단 한 조각을 줍고 추억으로 간직한다. 각 다른 도자기로부터 비롯된 추억의 조각들을 모아서 하나의 도자기를 만들면 그게 내 인생의 종착점이 아닐까 싶다. 난 그런 소중한 조각들을 나의 안 좋은 기억력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할 때도 있다. 그 노력의 방법으로 하나는 기록이고, 하나는 친구다.
E.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