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 직후 피폐해진 시대상 속에서, 헤르만 헤세는 이상적인 세계를 그린다. 그 세계가 바로 유리알 유희이다.
전쟁의 시대, 즉 “잡문 시대”를 겪은 세계는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정신적 엘리트들의 공동체인 카스탈리엔을 세운다. 국가는 카스탈리엔에 필요한 재정과 물자를 지원하고, 대신 카스탈리엔은 정신적으로 고도로 훈련되고 성숙한 인재를 길러내어 국가에 교사로서 봉사하게끔 한다. “유리알 유희”는 이러한 카스탈리엔 공동체의 정신 수양을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헤세 역시 세속과는 거리를 둔, 이러한 정신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은 없었던 것 같다.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은 번뇌와 고민으로 가득하다. 그는 끊임없이 카스탈리엔을 회의하고 의심한다. 과연 정신만으로 충분한가? 카스탈리엔 바깥의 삶들은 저렇게 충만해보이고, 저렇게 생기있어 보이는데?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삶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결국에는 이러한 회의와 의심, 정신과 속세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요제프 크네히트는 완전해진다. 그의 의심은 결국 정신과 속세를 잇는 다리가 되어, 하나의 균형을 제시한다. 그 균형을 그의 제자에게 위탁함으로써 그의 “설화”가 시작된다.
이렇듯 헤르만 헤세가 제시하는 이상향은 순환과 갈등의 조화, 그리고 상승의 고리인 것 같다. 이는 이어지는 세 편의 요제프 크네히트의 유고에서도 드러난다. 스승과 제자의 순환, 그 갈등을 통한 상위 차원으로의 상승, 이러한 상승의 자연스러운 반복. 헤르만 헤세는 그 어두운 시대 속에서, 이러한 반복을 통한 양극의 갈등과 균형으로 희망을 찾고자 했던 걸까?
E.O.D.